다테 데루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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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다테 데루무네는 1544년에 태어나 1585년에 사망한 센고쿠 시대 무장으로, 다테 가문의 16대 당주였다. 그는 아버지 다테 하루무네의 뒤를 이어 가문을 이끌며 세력 확장을 위해 노력했고, 오다 노부나가, 호조 우지마사 등과 외교 관계를 맺었다. 1585년, 하타케야마 요시쓰구와의 협상 과정에서 아들 다테 마사무네가 이끄는 가신들에게 납치되어 살해당했다. 그의 죽음은 다테 가문과 주변 세력 간의 관계를 악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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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테 데루무네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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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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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다테 데루무네 |
가명 | 히코타로, 후에 소지로우 |
시호 | 세이잔공 |
계명 | 가쿠한지덴 세이잔주신다이고지 |
묘소 | 야마가타현 요네자와시의 가쿠한지, 야마가타현 히가시오키타마군 다카하타정의 시후쿠지 |
관위 | 종4위하 좌경대부 |
씨족 | 다테 씨 |
생몰 | |
출생 | 1544년 |
사망 | 1585년 11월 29일 |
가족 | |
부모 | 아버지: 다테 하루무네, 어머니: 구보히메 (이와키 시게타카의 딸) |
배우자 | 요시히메 |
자녀 | 마사무네, 고지로, 지코히메, 여자, 히데오 |
형제자매 | 이와키 지카타카, 아나히메, 다테 데루무네, 교세이인 (다테 사네모토의 부인), 마스호히메 (고바야가와 모리무네의 부인), 루스 마사카게, 이시카와 아키미쓰, 히코히메, 호주인, 고쿠분 모리시게, 스기메 나오무네 |
친척 | 오나미히메 (누이), 루스 마사카게 (동생), 이시카와 아키미쓰 (동생), 고쿠분 모리시게 (동생), 모가미 요시아키 (매형) |
경력 | |
시대 | 센고쿠 시대 - 아즈치모모야마 시대 |
소속 | 15px 다테 씨 [[File:Mon-Oda.png|15px]] 오다 씨 |
직위 | 다이묘 |
지휘 | 요네자와 성 |
주요 전투 | 니혼마쓰 공성전(1568) |
정치 경력 | |
대수 | 16대 |
임기 | 1578년 - 1584년 |
전임 | 다테 하루무네 |
후임 | 다테 마사무네 |
2. 생애
덴분 13년(1544년) 다테 하루무네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아명은 히코타로(彦太郎), 후에 소지로(総次郎)로 불렸다. 형 이와키 지카타카가 외가인 이와키씨의 양자로 가게 되면서 다테 가문의 후계자가 되었다.[4] 에이로쿠 8년(1565년) 아버지 하루무네의 은퇴로 가독을 상속받아 다테씨 제16대 당주가 되었으나,[13] 초기에는 은거한 아버지와 가문 내 실력자들의 영향력 아래 있었다. 점차 가문 내 통제권을 강화하며 실권을 장악한 데루무네는 아시나씨, 모가미씨, 소마씨 등 주변 다이묘들과 동맹과 전쟁을 반복하며 다테 가문의 세력을 확장시켰다.
또한 중앙의 실력자인 오다 노부나가와 매를 선물하는 등 교류하며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고,[7] 노부나가가 혼노지의 변으로 사망한 후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지지했다.[9] 덴쇼 12년(1584년), 아시나 모리타카의 급사를 계기로 아들 다테 마사무네에게 가독을 물려주고 은퇴하였다.[19] 그러나 이듬해인 덴쇼 13년(1585년) 10월 8일, 화의를 맺었던 니혼마쓰 요시쓰구에게 납치되어 아부쿠마강 강변에서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다.[11][10][4] 향년 42세였다. 데루무네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사타케 요시시게의 개입을 부르는 등 남오슈의 정세를 급변시키고 아들 마사무네에게 큰 시련을 안겨주었다.
2. 1. 초기 생애와 가독 상속
덴분 13년(1544년) 9월, 다테 하루무네의 차남으로 다테군 서산성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이와키 시게타카의 딸인 쿠보히메이며, 아명은 히코타로(彦太郎)였고 후에 소지로(総次郎)로 불렸다.[4] 장남인 이와키 지카타카는 이와키씨와의 약속에 따라 외조부 이와키 시게타카의 양자로 보내졌기 때문에, 차남인 소지로가 다테 가문의 후계자인 세자(世子)가 되었다.덴분 17년(1548년), 덴분의 난이 화의로 종결되자 아버지 하루무네는 본거지를 오키타마군 요네자와성으로 옮겼고, 데루무네도 어머니와 형제들과 함께 요네자와성으로 이주했다.
덴분 24년(1555년) 3월 19일, 11세의 나이로 원복을 치르고 당시 무로마치 막부의 제13대 쇼군이었던 아시카가 요시테루에게 이름 한 글자(편휘)를 받아 '''데루무네'''(輝宗)라는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에이로쿠 8년(1565년), 아버지 하루무네가 은거하면서 가독을 계승하여 다테씨 제16대 당주가 되었다.[13] 데루무네는 요네자와성에 머물며 우에스기씨 방면의 경계를 담당했고, 은거한 하루무네는 아내 쿠보히메와 함께 시노부군 스기메성으로 옮겨가 소마씨나 이시바시씨 등과의 경계를 맡았다.[14] 같은 해 6월 19일에는 덴분의 난 이후 이구군 마루모리성에 은거하고 있던 조부 다테 다네무네가 78세로 사망했다.
그러나 데루무네가 가독을 막 계승했을 무렵에는 은거한 아버지 하루무네와, 덴분의 난을 계기로 가문 내 최대 실력자가 된 나카노 무네토키·마키노 히사나카 부자가 여전히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에이로쿠 9년(1566년) 1월, 아시나 모리우지와 화의를 맺을 때, 데루무네는 하루무네의 반대를 무릅쓰고 여동생 히코히메를 모리우지의 아들 아시나 모리오키에게 시집보냈다. 이때 만약 하루무네와 데루무네 사이에 분쟁이 생길 경우, 모리우지가 데루무네를 지지하기로 밀약을 맺었다고 전해진다.[15]
그 후 데루무네는 데와국 야마가타성 성주 모가미 요시모리의 딸이자 모가미 요시아키의 여동생인 요시히메를 아내로 맞이했다. 에이로쿠 10년(1567년) 8월 3일, 요네자와성에서 장남인 본텐마루(梵天丸), 즉 후일의 다테 마사무네가 태어났다.
2. 2. 세력 확장과 외교
에이로쿠 8년(1565년), 아버지 다테 하루무네가 은거하자 다테 씨 제16대 당주가 되었다.[13] 그러나 초기에는 아버지 하루무네와 天文의 난 이후 가문의 실력자가 된 나카노 무네토키·마키노 히사나카 부자가 실권을 쥐고 있었다. 데루무네는 아시나 모리우지와 화목을 맺을 때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여동생 히코히메를 모리우지의 아들 모리오키에게 시집보냈고(1566년), 이를 통해 아시나 가문으로부터 유사시 지지를 약속받았다.[15] 이후 데와국 야마가타성주 모가미 요시모리의 딸이자 모가미 요시아키의 여동생인 요시히메와 혼인하였다.에이로쿠 13년(1570년), 데루무네는 나카노 무네토키에게 반역 혐의를 씌워 마키노 히사나카의 거성인 고마쓰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나카노 부자를 추방함으로써 가중의 실권을 완전히 장악했다. 이 과정에서 비협조적인 가신들도 처벌하였다. 같은 해, 처가인 모가미씨에서 모가미 요시모리와 아들 모가미 요시아키 사이에 내분이 일어나자 장인을 지원했으나, 아내 요시히메의 요청으로 군대를 물렸다. 실권을 잡은 데루무네는 오니와라 요시나오와 엔도 모토노부 같은 유능한 인재를 등용하여 각각 내정과 외교를 맡겼다.
데루무네는 아버지 하루무네의 외교 노선을 계승하여 아시나씨와의 동맹을 유지하면서 남오슈 지역 제후들 간의 분쟁을 조정하는 역할을 했다. 또한 광범위한 외교 활동을 펼쳐 덴쇼 3년(1575년)부터는 중앙의 실력자 오다 노부나가에게 매를 선물하는 등 교류를 시작했고, 엔도 모토노부를 통해 호조 우지마사, 시바타 가쓰이에와도 서신과 선물을 주고받으며 우호 관계를 구축했다.[7] 노부나가는 데루무네에게 보낸 편지에서 에치젠과 가가 지방에서 벌인 학살을 자랑하기도 했다.[8] 덴쇼 10년(1582년) 노부나가가 암살된 후에는 뒤이은 권력 다툼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지지했다.[9]
주변 세력과의 관계에서는 충돌과 협력을 반복했다. 1568년에는 니혼마쓰 요시쓰구의 니혼마쓰 성을 공격했으나 수적 열세로 실패했다.[4] 1574년과 1578년에는 처남인 모가미 요시아키와 두 차례 싸웠는데, 두 번 모두 아내 요시히메가 전장으로 나아가 중재하여 화약을 맺었다.[5]
덴쇼 6년(1578년), 우에스기 켄신 사후 에치고에서 오타테의 난이 발발하자, 데루무네는 호조씨, 아시나씨와 동맹을 맺고 우에스기 카게토라를 지원했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후 덴쇼 9년(1581년)부터는 신발타 시게이에가 우에스기 카게카쓰에게 반기를 든 신발타의 난에 개입하여, 아시나 모리타카, 시바타 가쓰이에와 연계하여 시게이에를 지원하며 에치고 문제에 지속적으로 관여했다.
한편, 숙적인 소마 모리타네·요시타네 부자와의 전투에서는 고전했지만, 덴쇼 7년(1579년) 다무라 키요아키의 딸 아이히메를 아들인 다테 마사무네의 정실로 맞이하여 소마 측의 동맹을 약화시켰다. 덴쇼 11년(1583년)에는 요충지인 마루모리성을 탈환하고, 이듬해 덴쇼 12년(1584년)에는 가네야마성마저 공략하여 마침내 이구군 전역을 되찾았다.[16] 이를 통해 소마씨와 화평을 맺고 우다군을 소마령으로 인정하는 대신 이구군을 다테령으로 확정했다. 이로써 다테 가문은 조부 다테 타네무네 시절의 세력권을 거의 회복하고 남오슈 지역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덴쇼 11년(1583년) 시즈가타케 전투에서 동맹이었던 시바타 가쓰이에가 하시바 히데요시에게 패배하자, 데루무네는 히데요시 세력의 동진(東進)에 대비하여 오슈의 여러 다이묘들을 규합하여 대항할 의지를 보이기도 했다.[17] 그러나 당시 남오슈 남부에서는 히데요시와 연결된 히타치국의 사타케 요시시게가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기에 실제 규합은 쉽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18]
덴쇼 12년(1584년) 10월, 동맹 관계였던 아시나 모리타카가 가신에게 살해당하자 데루무네는 그의 갓난 아들 아시나 가메오마루의 후견인이 되었다. 이 일을 계기로 데루무네는 아들 마사무네에게 가독을 물려주고 은퇴를 결심, 새로 지은 다테야마성으로 거처를 옮겼다. 본인은 에치고 개입에 전념할 생각이었으나, 가독을 이은 마사무네는 우에스기 카게카쓰와 강화를 맺고 에치고 개입책을 포기하면서 아시나 가문 내부에 다테 가문에 대한 불신을 키우는 결과를 낳았다. (일설에는 데루무네가 자신의 차남 다테 코지로를 아시나 가문의 후계자로 삼으려다 사타케 요시시게의 반대로 실패하여 은거했다는 주장[19]과, 아시나 가문과의 동시 가독 계승을 통해 혼란을 막으려 했다는 주장[20][21]이 있다.)
이듬해 덴쇼 13년(1585년), 마사무네는 장인 다무라 키요아키의 요청에 따라 다테-아시나 연합에 속해있던 오우치 사다쓰나에게 다무라 가문에 다시 복속할 것을 명령했다. 사다쓰나가 이를 거부하자 마사무네는 군사를 일으켜 아시나 영지를 침공하고(関柴合戦), 오우치 사다쓰나와 그의 인척인 니혼마쓰성주 니혼마쓰 요시쓰구를 공격했다. 이러한 마사무네의 급격한 노선 변경은 데루무네가 쌓아 올린 남오슈의 외교 질서를 흔들었다.
같은 해 10월, 니혼마쓰 요시쓰구는 결국 마사무네에게 항복을 청했고, 데루무네와 다테 사네모토의 중재 하에 영지의 대부분을 몰수당하는 조건으로 화의가 성립되었다. 10월 8일(1585년 11월 29일), 요시쓰구는 사의를 표하기 위해 미야모리성에 머물던 데루무네를 방문했다. 면담 후 요시쓰구를 배웅하던 데루무네는 갑자기 요시쓰구와 그의 부하들에게 납치되었다.[11][10] 다테 가문의 기록(시게자네기, 다테 지케 기록)에 따르면, 추격해 온 다테군이 아부쿠마 강가의 다카다하라에서 요시쓰구 일행을 포위하자 데루무네가 자신을 포함해 쏘라고 외쳤고, 이 신호에 따라 다테군이 일제 사격을 가해 데루무네와 요시쓰구 일행 모두 사망했다고 한다.[10] 다른 기록에는 요시쓰구가 데루무네를 살해했다거나(아이즈 후풍토키), 심지어 마사무네가 직접 둘을 죽였다(오슈 영웅기)는 내용도 있으며, 마사무네가 데루무네를 제거하기 위해 꾸민 음모라는 설도 제기되었다.[22] 데루무네는 향년 42세로 사망했다.
데루무네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다테 가문과 주변 세력 간의 관계를 극도로 악화시켰다. 특히 사타케 요시시게의 본격적인 오슈 개입을 초래했고, 이시카와 아키미쓰 등 동맹 세력의 이탈을 불렀다. 이로 인해 마사무네는 히토토리바시 전투에서의 고전, 덴쇼 15년(1587년) 아시나 가메오마루 사후 아시나 가문 계승 문제에서의 패배 등 외교적, 군사적으로 큰 어려움을 겪게 되었고, 덴쇼 16년(1588년)의 고리야마 전투에서 승리할 때까지 궁지에 몰렸다.
2. 3. 비극적인 죽음
덴쇼 12년(1584년) 10월, 아시나 모리타카가 사망하자 데루무네는 마사무네에게 가독을 넘기고 은퇴하여 다테야마성으로 이주했다.[19] 그러나 가독을 계승한 마사무네는 아버지 데루무네의 외교 노선과는 달리 우에스기 가게카쓰와 강화를 맺고, 아시나씨 가문 내 다테 가문에 대한 불신감을 증대시켰다. 이듬해 덴쇼 13년(1585년) 봄, 마사무네는 장인 다무라 기요아키의 요청에 따라 오우치 사다쓰나에게 다무라 씨 휘하로 돌아갈 것을 명령했다. 사다쓰나는 데루무네의 조정을 따랐을 뿐이라며 이를 거부했고, 마사무네는 같은 해 5월 아시나 영지를 침공했으며(관산 전투), 이후 사다쓰나와 그의 인척인 니혼마쓰성주 니혼마쓰 요시쓰구를 공격했다. 이러한 마사무네의 급격한 전략 변경은 데루무네가 구축했던 남오슈 지방의 외교 질서를 붕괴 위기로 몰아넣었다.같은 해 10월, 니혼마쓰 요시쓰구는 마사무네에게 항복을 청했다. 데루무네와 다테 사네모토의 중재 하에, 5개 마을을 제외한 모든 영지를 몰수당하는 가혹한 조건으로 화의가 성립되었다. 10월 8일(1585년 11월 29일), 요시쓰구는 중재에 대한 감사를 표하기 위해 데루무네가 머물고 있던 미야모리성을 방문했다. 면담을 마치고 요시쓰구가 떠나려 할 때, 현관에서 그를 배웅하던 데루무네는 요시쓰구와 그의 가신들에게 갑자기 납치당했다. 이 소식을 들은 다테 시게자네와 토메 마사카게 등이 즉시 군사를 이끌고 추격했다.[11][10]
추격 끝에 니혼마쓰 영지와의 경계인 아부쿠마강 강변의 다카다하라(高田原)에 이르렀을 때, 데루무네의 최후에 대한 기록은 여러 갈래로 나뉜다.
- 시게자네가 쓴 것으로 알려진 『시게자네키』(成実記)와 다테 가문의 공식 기록인 『다테 치카 기록』(伊達治家記録)에 따르면, 데루무네가 자신을 포함해 적과 함께 쏘라고 외치자, 다테 군사들이 일제히 총격을 가해 데루무네와 요시쓰구 일행 모두가 사망했다고 한다. 사냥 중 소식을 듣고 달려온 마사무네가 현장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모든 상황이 끝난 후였다고 기록되어 있다.[10]
- 다른 기록인 『아이즈 규지잡고』(会津旧事雑考)에서는, 현장에 도착한 마사무네를 보고 모든 것을 각오한 요시쓰구가 데루무네를 살해했다고 전한다.[10]
- 『오슈 에이케이 군기』(奥州永慶軍記)는 마사무네가 직접 요시쓰구와 데루무네를 함께 사살했다고 주장한다.
- 쇼와 시대의 역사학자 다카야나기 고토스(高柳光寿)는 데루무네의 존재를 부담스러워했던 마사무네가 이 사건을 계획했다는 음모설을 제기하기도 했다.[22]
이 사건으로 데루무네는 향년 42세로 사망했다. 그의 시신은 후쿠시마현 후쿠시마시에 있는 수덕사(寿徳寺, 현재의 지토쿠지)에서 다비(荼毘)에 부쳐졌고, 야마가타현 다카하타정의 시후쿠지(資福寺)에 안장되었다. 데루무네의 죽음을 슬퍼하며 엔도 모토노부, 우치바바 우에몬(内馬場右衛門), 스다 호키(須田伯耆) 세 명의 가신이 그를 따라 순사했다.
데루무네의 비극적인 죽음은 다테 가문과 주변 세력 간의 관계를 급격히 악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특히 사타케 요시시게의 본격적인 오슈 개입을 초래했으며, 이시카와 아키미쓰를 비롯한 동맹 세력들이 다테 가문을 이탈했다. 이는 같은 해 11월에 벌어진 히토토리바시 전투에서 다테 군이 고전하는 원인이 되었고, 덴쇼 15년(1587년) 아시나 가메오마루 사후 아시나 가문의 후계자 문제에서도 패배하는 등, 마사무네에게 여러 군사적, 외교적 어려움을 안겨주었다. 이러한 위기 상황은 덴쇼 16년(1588년) 고리야마 전투에서 승리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3. 가족 관계
- 아버지: 다테 하루무네 (伊達 晴宗, 1519–1578)
- 어머니: 쿠보히메 (久保姫, 1521–1594) - 사이쇼인(栽松院), 이와키 시게타카의 장녀
- 정실: 키히메 (義姫, 1548–1623) - 호슌인(保春院), 모가미 요시모리의 딸
장남**: 다테 마사무네 (伊達 政宗, 1567–1636)
차남**: 코지로 (伊達 政道, 1568–1590)
딸**: 치코히메 (千子姫) / 센코히메 (仙子姫)
딸**: 센시히메 (詮子姫)
- 첩: 이름 불명
아들**: 히데오 (秀雄) - 다이히간지(大悲願寺) 15세 주지, 에도 나카노 호센지(宝仙寺) 14세 법인(法印)
- 여동생: 오나미히메 (小波姫)
- 양녀: 히코히메 (彦姫, 1552?–1588) - 다테 하루무네의 넷째 딸. 아시나 모리오키의 정실이었으나, 남편 사후 아시나 모리타카의 정실이 됨.
4. 주요 가신
- 오니니와 요시나오
- 다테 사네모토
- 엔도 모토노부
- 시로이시 무네자네
5. 평가
- 아들 정종은 말년에 가신 기무라 요시치카(木村可親)에게 아버지 데루무네를 회고하며 "데리무네 공(てり宗公)"이라고 불렀다고 한다.[23]
- 데루무네는 장남 정종의 교육에 매우 열정적이어서, 1572년에는 가이(甲斐)국에서 쾌천소키(快川紹喜)의 제자인 임제종(臨済宗) 승려 코사이소이츠(虎哉宗乙) 젠시(禅師)를 초빙하는 등 많은 학자와 승려를 거성인 요네자와성(米沢城)으로 초청했다. 또한 가타쿠라 가게쓰나(片倉景綱), 야시로 가게요리(屋代景頼), 유노메 가게야스(湯目景康) 등 유망한 젊은 가신들을 선발하여 일찍부터 정종을 보좌하게 했다.
- 1574년의 일기(센다이시 박물관 소장 '덴쇼 2년 어일일기', 통칭 '이다테 데루무네 일기')를 직접 남겼는데, 날씨 변화를 상세히 기록하고 수정까지 더하는 등 꼼꼼한 면모를 보인다. 이 일기는 당시 오슈(奥羽) 지방의 정치, 군사 상황뿐만 아니라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와의 외교, 사타케 요시시게(佐竹義重)와의 전투, 가신 및 일족과의 교류, 각종 행사 등 이다테 가문 당주의 생활상을 다각적으로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내용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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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말까지 이어짐 |
사자(使者) 및 서신 도착 기록 | |
토벌한 적 수, 도착한 수급 등 |
엔도 모토노부 저택에서의 다탕(茶湯), 담합 등 |
고신마치(庚申待), 노 관람, 신사 도리이 및 성 돌 운반 공사 등 |
궁술 훈련, 군마 시승 및 구입(수일 소요) |
- 일기에는 공적인 업무 기록이 대부분이며, 아들인 본텐마루(梵天丸)나 지쿠마루(竺丸)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고, 아내 요시히메(義姫)와의 교류 기록도 5회에 불과하다. 문장에서 자신을 지칭할 때는 '모(某)'를 사용했고, 아버지 하루무네(晴宗)는 거처인 스기메성(杉目城)을 빌려 '스기메(杉目)의 위쪽 분'이라 칭했으며, 인명은 엔도 모토노부를 '엔나이(遠内)', 사타케 가문의 무리를 '사슈(佐衆)'로 부르는 등 약칭을 자주 사용했다.
- 같은 해 8월 21일 오후 2~4시경, 덴쇼 최상의 난 당시 나라시타(楢下)에 주둔 중 누군가에게 저격을 당하기도 했다. 동행자 중 한 명이 총에 맞았고(이름 및 생사 불명), 니시오에다 모(西大枝某)의 무가봉공인 중 주겐(中間)이 놀란 말에 밟혀 사망했다.[24]
- 노(能)를 매우 좋아하여, 1574년 한 해에만 이틀에 걸친 권진노(勧進能)를 두 차례, 메이신(明神) 앞에서 한 차례, 엔도 모토노부의 저택에서 여러 차례 관람한 기록이 일기에 남아있다. 또한 전속 노가쿠시(能楽師)였던 호리이케 다다키요(堀池忠清)가 남긴 우타이본의 존재로 미루어 볼 때, 데루무네 자신도 노 연습에 힘썼을 것으로 추정된다.[25]
- 1584년 말, 가문을 계승한 정종이 처음으로 맞이하는 설날을 앞두고 직접 쓴 지도 문서를 보냈다.[26] 이 문서에는 1월의 의례 절차가 매일 상세히 기록되어 있어, 데루무네의 꼼꼼함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날짜 | 주요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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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 인사객 맞이, 식삼헌(式三献) 베풀기 |
사이소메(買い初め, 새해 첫 쇼핑), 쇼하지메(書初め, 새해 첫 글쓰기) |
외출 |
목욕 (머리는 감지 않음) |
류호지(龍寶寺)[28] 신년 참배 |
사찰 방문 및 헌상품 답례, 렌가시(連歌始), 란부슈 쿄겐슈(乱舞衆狂言衆) 접대, 우마다시(馬出し, 말 점검), 성문 관리 주의사항 등 (~20일) |
고마교(護摩行) |
의례 마무리 (結願) |
- 데루무네가 사망한 니혼마쓰시에는 '데루무네공 하마(輝宗公 下馬)'라는 푯말이 세워진 만닌코모리 지조손(萬人子守地蔵尊)이 있다. 사당의 유래에 따르면, 마을 아이가 잃어버린 지장보살상이 강을 따라 와타리군 아라하마(荒浜)까지 떠내려가 그곳에 역병이 돌자, 기도사가 지장의 유래를 깨닫고 돌려보냈다고 한다. 다른 설로는 정종이 오하마(小浜)성에 있을 때, 데루무네가 아들의 건강과 무운을 기원하며 이 지장보살에게 매일 기도했다고도 전해진다.
- 이다테 가문의 오랜 관습이었던 혼인 외교로 인해 오슈(奥羽) 지방에 분쟁이 끊이지 않았던 것에 영향을 받았는지, 후세에는 일반적으로 데루무네가 측실을 두지 않았다고 알려져 있다.
6. 대중문화 속 데루무네
- 1942년 다이에이 교토에서 제작하고 이나가키 히로시가 감독한 영화 《독안룡 마사무네》에서는 배우 가가와 료스케가 다테 데루무네 역을 연기했다.
- 1959년 도에이 교토에서 제작하고 코노 스스무가 감독한 영화 《독안룡 마사무네》에서는 배우 츠키가타 류노스케가 다테 데루무네 역을 맡았다.
- 1987년 NHK의 대하드라마 《독안룡 마사무네》(独眼竜政宗|도쿠간류 마사무네일본어)에서는 배우 기타오지 긴야(北大路欣也)가 다테 데루무네 역을 연기했다.[12]
- 2016년에 공개된 후쿠시마현 다테시의 향토 애니메이션이자 2021년에 극장판으로도 제작된 《마사무네다테니쿠루》에서는 성우 츠치다 레오가 목소리를 연기했다. 이 작품은 애니메이션 제작사 가이나가 제작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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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Samurai Commanders: 1577–1638
https://books.google[...]
Google Books
2012
[2]
서적
The Samurai Sourcebook
Cassell & Co
1998
[3]
학술지
Life of Date Masamune
https://books.google[...]
1893
[4]
서적
Japan and Her People
H. T. Coates & Company
1902
[5]
서적
戦国なるほど人物事典: 100人のエピソードで歴史の流れがよくわかる
https://books.google[...]
PHP研究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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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서적
Date Terumune
https://books.google[...]
The Japan Biographical Encyclopedia & Who's Who
1964
[7]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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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
[8]
서적
Japanese Fortified Temples and Monasteries AD 710–1602
Bloomsbury Publishing
2012
[9]
학술지
Life of Date Masamune
https://books.google[...]
1893
[10]
서적
Samurai Commanders (2): 1577–1638
Bloomsbury Publishing
2012
[11]
서적
Transactions
R. Meiklejohn & Co.
1893
[12]
웹사이트
대하드라마 독안룡 마사무네
https://www2.nhk.or.[...]
NHK
2019-07-25
[13]
문서
성산공 치가 기록에 따르면, 가독 상속은 작년 겨울부터 올해 여름 사이였지만 자세히 알 수 없어, 당분간 올해를 치세의 시작으로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14]
문서
다테 히가즘 치국의 항목에서
[15]
논문
멀리 있는 다테 하루무네 - 동시대 사료와 근세 가보의 차이
엔도 유리코 편집, 중세 간토 무사 연구 시리즈 제25권 전국 다이묘 다테씨
2019
[16]
문서
성산공 치가 기록 동일 항목 기재. 대일본사료도 이것을 동일 날짜의 서장으로 하고 있다. 한편, 고바야시 세이지는 미야자와 시시 자료편 1(1985년)에서 이 서장의 날짜를 천정 10년(1582년)으로 고치고 있지만 명확한 근거를 제시하고 있지 않다.
[17]
문서
성산공 치가 기록 동일 항목 기재. 대일본사료도 이것을 동일 날짜의 서장으로 하고 있다. 한편, 고바야시 세이지는 미야자와 시시 자료편 1(1985년)에서 이 서장의 날짜를 천정 10년(1582년)으로 고치고 있지만 명확한 근거를 제시하고 있지 않다.
[18]
서적
이다테 마사무네와 남오쿠의 전국 시대
[19]
서적
이다테 마사무네 연구
[20]
서적
이다테 마사무네와 남오쿠의 전국 시대
[21]
서적
이다테 마사무네와 남오쿠의 전국 시대
[22]
서적
청사단홍
아사히 신문사
1962
[23]
서적
이다테 마사무네 언행록 기무라 우에몬 각서
신인물 왕래사
1997
[24]
서적
이다테 테루무네 일기
[25]
문서
호리이케 부자절부 관세류 요혼의 옥서에는 오야가타사마노 고혼으로 인정하고 있다.
[26]
문서
센다이시 박물관 소장 정월 시치키지, 도쿄대학 시료 편찬소 편 이다테 테루무네 정월 행사
[27]
웹사이트
센다이 첫 판매의 유래가 되는 가장 오래된 사료이다.
https://web.archive.[...]
2022-12-28
[28]
웹사이트
초대 이다테 아사무네 이래의 기원사.
https://ryuhouji.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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